친구지만 영원히 친구일 수 없는 이들의 쓸쓸함

은희경 소설 <우리는 왜 얼마동안 어디에>

박희린 기자 승인 2022.07.01 09:47 의견 0
(사진=픽사베이)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인류는 한층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띄게 됐다.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약 2년 동안 지속되면서 사람 사이 거리는 그 시간만큼 크게 벌어지게 했다. 함께 영화관에 가는 대신 OTT를 통해 홀로 방구석 1열의 즐거움을 만끽하는데 어느새 익숙해 졌다. 잠깐 일 줄 알았던 그 혼자만의 시간이 2년 동안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심리적 거리가 생겨 버린 듯 모두 홀로인 게 편해 보이는 요즘이다. 또한 여럿이 함께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모임 대신 한 두 명과 가볍게 만나 식사와 차를 즐기는 편이 자신의 시간을 지키는데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또한 그것이 은근히 편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어느새 혼자만의 시간으로 파고드는 일상에 익숙해 진 것처럼 보인다.

많은 것을 변화 시킨 이 사회적 거리두기는 필연처럼 Z세대의 사회 진출과 함께 시작되었다. 자기 자신의 행복과 편의가 그 무엇보다 우선인 세대의 성향과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이미 회식 문화가 낯설고, 야근은 사라졌다. 감히 이 세대들에게 야근의 타당성을 논하거나, 과거 조직 문화를 들먹일 수도 없는 시대다.

그렇게 확보된 저녁이 있는 일상은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지만 과연 관계의 다양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삶을 풍요롭게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늘날의 이 세대와 세태는 일면 지독히 개인주의적이고, 전시적인 소설가 은희경 작품 속 인물들과 무척 닮아 보인다.

(사진=박희린 기자)

작가 은희경이 2020년 ‘창작과 비평’ 봄호를 통해 발표한 ‘우리는 왜 얼마동안 어디에’는 지난해 12월 31일 문학동네에서 그의 소설 4편을 묶어 발행한 ‘장미의 이름은 장미’에 수록되어 있다. 연작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는 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 가장 앞 순서에 배치되어 있는 ‘우리는 왜 얼마동안 어디에’는 친구이지만 영원히 친구일 수 없을 것 같은 민영과 승아의 이야기가 각자의 시선에서 펼쳐진다.

지하철에는 빈 자리가 많았다.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은 뒤 민영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두어 정거장쯤 지났을까. 다시 눈을 뜨더니 승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니가 진짜 올 줄은 몰랐어” “왜?” “다들 바쁘니까” “바쁘긴 하지” 민영의 말에 애매하게 대꾸한 다음 승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진=픽사베이)

미국 맨하튼에서 유학을 하고 취업에까지 성공한 친구 민영을 찾아간 승아의 대화다. 어릴 적 친구이자 미국 여행의 거처로 결정하고 먼 길을 떠나왔지만 승아는 민영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혼자 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 대범하지 못한 승아가 선뜻 미국행을 결정한 것은 그곳에 친구 민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아는 민영을 어릴 적 친구의 정감으로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승아를 민영이 모를 리 없다. 보이지 않는 감정에 휩싸인 둘은 그렇게 자기애에 갇혀 친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행을 혼자 하지 못할 만큼 소심한 승아를 두고 민영은 내내 자신의 일을 보러 밖으로 나간다. 승아는 끼니를 해결하는 것조차 두려워 환기도 제대로 안 되는 민영의 방에서 요리를 감행하지만 그 조차 민영에게는 불쾌하기만 한 일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승아는 천진하다 못해 눈치가 없었다. 돈가스냐 떡볶이냐 같은 사소한 일도 쉽게 결정을 못해 일일이 민영에게 의지하는 한편으로 고집이 세고 인정 욕구가 강했다. 민영이 유학을 떠날 때 승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밤새 쓴 손 편지를 건네주었는데, 미국 친구가 생기면 자기처럼 평범한 소꿉친구 따위는 곧 잊어버릴 거라며 민영이 아니라는 말을 스무 번 쯤 반복할 때까지 훌쩍임을 멈추지 않았다. 일주일분의 해독 주스라니. 손 편지처럼 고맙고 감동적이지만 그것을 영원히 간직하라는 말만큼이나 부담스러웠으며 또 궁금하지도 않았다. 친하다고 해서 비슷해질 필요는 없었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미소를 보내고 손을 흔들면 되었다. 민영은 그것을 납득시키면서 유지해야 하는 관계들이 피곤했고 적당한 기만으로 덮어두지 못하는 자신 역시 지겨웠다.

나 아닌 다른 외국인 친구가 생길까봐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던 승아의 심정에 밀착하지 못하는 민영은 승아의 서글픔보다 자신의 감정이 더 중요하다. 자기애로 똘똘 뭉쳐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을 향한 타인의 감정이 불편할 뿐이다. 어릴적 친구를 향한 이토록 노골적 감정이라니. 어쩌면 민영의 감정은 현재를 살아가는, 더군다나 팬데믹을 겪은 세대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단상이다.

(사진=픽사베이)

민영의 감정이 틀리지 않다. 그렇다 친하다고 해서 비슷해질 필요는 없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미소를 보내면 그 뿐일 정도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현재의 팍팍함이 어쩌면 지극히도 편안하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민영에게 승아의 마음은 불편하고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아는 민영에게 의지한다. 동시에 민영의 불친절함에 내심 화가 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을 앞당기려고 다방면으로 알아본다. 그러나 그마저도 혼자서는 쉽지 않다. 결국 승아는 민영에게 불편을 감수하라는 듯 노골적인 불친절함을 모른 척 한다. 다만 함께 같은 곳을 보며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는 정도의 우정을 나누면서 말이다.

“여기서 오래 혼자 살다보면 그냥 친절한 건지 특별한 감정인지 잘 구별 못하게 돼. 자기들끼리 선을 그어놓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한테 친절하게 보이려는 사람들이 좀 있거든.” 승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디살든 다 마찬가지 같아.” 다음 순간 승아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말야. 왜 얼마 동안 어디에를 생각해봐. 거기에 대답만 잘하면 문을 통과할 수 있어.”
민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눈치였다. 둘은 묵묵히 강 건너를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민영은 과연 친절인지, 특별한 감정인지 구분 못할 정도로 헷갈리는 타지에서의 관계에 안정감을 느끼는 것일까. ‘Only One’은 부담스럽고 기꺼이 ‘One of Them’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원오브뎀은 불안정하나 온니원은 부담스러운 게 Z세대의 공감은 아닐까. 흡사 맨하튼을 강 건너에서 보는 게 더 좋은 것처럼 말이다. 한 눈에 맨하튼을 볼 수 있는 지역에서 한 발 떨어져서 그렇게. 가까이 가면 너무 큰 맨하튼이 부담스럽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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