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남편의 돈을 가지고 지금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러 간다. 가스레인지 옆에 기름때가 낄까 봐 달력에서 오려 붙인 바이칼 호수에 가기 위해서이다. 골목을 빠져나와 버스정류장까지 가는데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여기를 벗어나면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천 년이나 된 호수에 들어가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갈망에서 시작되었다. 아침이 되면 난리가 날지도 모른다. 어두워서 밖은 잘 보이지 않고 십여 년 전 이 시각쯤에 차창으로 고개를 돌리고 울고 있던 여자가 겹쳐 보인다.
코로나 시대에 자유롭게 여행을 갈 수 없지만 여행의 힘을 믿는 작가가 길 위에서 보낸 시간을 추억하며 소설로 그려낸다. 여행 큐레이터이자 작가인 김윤경 씨가 첫 소설집 ‘길 위의 시간’을 발간했다. ‘길 위의 시간’에는 작가의 등단작을 비롯해 총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여행이 그러하듯 소설도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처럼 가볍게, 여행가는 길의 친구처럼, 인생이란 여정에 한 줄의 위로와 공감을 선사한다.
말로 다 못할 개인적인 사정에 처해 있는 이들이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직시하고 해결해 가는 방법은 머무르지 않는 것, 즉 여행이다. 현재의 공간은 나에게 가장 익숙한 장소이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삶의 치명상은 온전히 내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더 많이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아이러니를 완성하는 것이 바로 ‘낯선 길 위에서의 치유’다.
(사진=김윤경 작가 블로그)
‘길 위의 시간’ 속 ‘길’의 종착지는 방황이나 슬픔 혹은 고통이 아니다. 김윤경 저자는 여행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는 힐링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정말 잘 머무르기 위해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로 돌아와야 하는지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소설에 담아냈다.
김윤경 작가는 울산에서 태어났으며 울산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2016년 동서문학상 ‘알혼섬에 묻다’가 입선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고 2019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소설 ‘레몬과 오렌지’가 당선돼 등단했다.
(사진=휴앤스토리)
오지를 찾아다니다가 여행 큐레이터가 돼 관광객을 인솔하며 해외에도 자주 나간다. ‘여행 보내주는 여자’로 활동하며 여행 칼럼 ‘김윤경의 여행 스케치’를 연재 중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타이틀로 자서전 쓰기와 한국사 강의도 한다. 여행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묻는 글을 쓰면서 또 다른 여행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