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초상
대한민국에서 결혼 전의 여성과 결혼 후의 여성은 얼마나 다른가. 결혼 전 부모에게는 한 없이 자랑스러운 재능이자 귀여운 습관은 결혼과 동시에 시부모의 눈엣가시가 되기 일쑤다. 같은 사람인데 다른 시각으로 보이고,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어야 하는 여자의 인생은 어쩌면 도박일지도 모른다.
여기 조선 중기에 도입된 명나라 친영제 결혼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최초의 시집살이를 한 천재 시인이 있다. 어릴 적 친정에서는 하늘과 바람과 별이, 자연스레 제각각 나고 자라는 풀과 나무를 생생하게 시로 읊어내던 초희(허난설헌)는 결혼 후 남편보다 우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고된 시집살이를 감내해야 했다.
시집살이로 인해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서서히 몰락해가는 비운의 여인 이야기가 처절하고 또 아름답게 담긴 책이 ‘초희; 난설헌의 사라진 편지’다.
류서재 지음 | 파소출판사 | 2020년 12월 23일 출간
■ 조선 중기 소수자들의 삶을 여실히 엿볼 수 있는 Strength(강점)
책은 흥미진진하다. 조선 중기 서자로 살아가야 하는 설움은 초희의 시 스승 이달을 통해서 생생하게 투영된다. 재능이 있으되 여자라는 이유로 펼치지 못하는 시대적 불운은 초희와 황진이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각각의 소수자는 ‘과거’라는 제도를 통해 연결된다. 서자라는 이유로 과거 시험을 볼 수 없는 사회적 금기가 ‘문인’이라는 가면을 쓴 채 소수자들을 산 속에 모이게 한다. 이는 허균의 ‘홍길동전’의 모티브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동생 균을 따라 문인 모임에 참석했던 초희는 비로소 하늘과 달과 별이 아닌 사람과 사회를 보게 된다. 여기서부터 사회 제도에 대한 불합리함을 느끼고 문제의식을 싹틔우지만 그것은 조선을 살아가는 여자에게 비극의 시작이었으리라.
책에서는 초희의 동생이자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품성도 엿볼 수 있다. 책은 누이를 잃은 허균의 처절한 슬픔에서부터 시작된다. 27세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하면서 자신의 시를 모두 불태워 달라고 유언한 초희의 불안했던 삶은 동생 허균을 통해서 영혼 불멸의 삶을 살게 된다.
허균은 불타다 남은 초희의 시를 모아 중국으로 가져가 책으로 발간해 낸다.
'초희; 난설헌의 사라진 편지' 마지막 장 (사진=안소정 기자)
■ 고증이라는 숙제를 풀기 위해 소설로 써 내려간 Weakness(약점)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인문학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다만 사료에 몇 줄 기록되지 않은 허난설헌이라는 인물을 448쪽이라는 분량에 담아내기 위해 작가적 허구와 상상력이 가미되어야 했다.
천재시인의 비극을 부각하기 위해 어린시절의 삶은 더욱 아름다워야 했을 것이다. 결혼 후 남편과의 관계, 줄줄이 짧은 생을 마감했던 초희의 자녀들과 엄마의 슬픔은 소설가를 통해 극대화됐다.
하지만 책은 역사를 그대로 담은 인문학 서적이 아닌 소설이다. 소설적 허구로 인해 독자는 직접 사실과 상상력을 분리해내야 하는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 신사임당보다 드라마틱한 이야기 Opportunity(기회)
지난해 12월에 출간된 책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기에 충분히 드라마틱하다. 신사임당이 ‘신사임당 빛의 일기’라는 TV드라마로 하여금 이영애로 부활해 인기를 끌었던 만큼 책을 원작으로 한 허난설헌의 이야기는 시청자나 영화 관객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실제로 최근 MBC ‘선을 넘는 녀석들2’에서 역사 강사 설민석은 강릉 방문 시 허난설헌 생가에서 조선시대를 살아간 초희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흡사 이 책을 토대로 한 이야기인 냥 내용은 상당부분 일치한다.
■ 완독의 수로고움, 얇은 종이는 Threat(위협)
448쪽이라고는 하나 책은 다른 책들에 비해 얇은 종이에 활자를 찍어냈다. 이 때문에 흥미로운 이야기에 끌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지만 좀처럼 독서에 속도가 붙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책장 넘기는 즐거움을 선사할 만한 종이를 사용했으면 완독률을 조금 더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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