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간의 발견]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의 간극

윤대녕 '천지간'

안소정 기자 승인 2024.10.11 13:15 의견 0
사진=구계등

대학 2학년 때 친구의 입대를 기념(?)해 제주도 여름 여행을 계획했다. 동기 5명은 기차와 배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고, 완도로 향했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것이 꼭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실시간으로 교통 상황을 확인할 수 없던 시대라, 결국 완도항에서 제주행 배를 놓쳤다.

젊은 시절 무엇이 무섭겠는가. 어차피 여행 온 것이니 완도를 구경하자고 했고, ‘걸어가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하는 마음에 도착한 곳이 완도 정도리 구계등이다. 파도에 밀려 표면에 나타난 자갈밭이 9개의 계단을 이루어 구계등이라 불린다는 확인 안된 지명을 가진 곳이다. 1층에 횟집인 여관 2층을 잡고, 파도 소리 벗 삼아 술 마시며 놀았다.

새벽에 일어나 본 안개 낀 구계등 풍경은 묘했다. 자잘한 자갈로 이뤄진 해변에 방치된 부선 나무배 뒤로 깔린 안개는 으스스하면서도, 몽롱한 느낌을 줬다. 잠시 잠깐 바라봤던 시간이 1시간이니 뭐에 홀리긴 홀렸나 보다. 그렇게 완도에서의 짧은 일정 후, 제주로 가 군입대 기념 여행을 마쳤다.

개강 후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손에 집힌 책이 있었다. 제2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이었고, 표지에는 수상작품인 윤대녕의 ‘천지간’이라는 글자가 크게 박혀있었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 ‘나’는 외숙모의 부음을 듣고 광주로 향한다. 그런데 터미널에서 우연히 한 여자를 보고, 이상한 인연의 힘에 이끌려 여자를 뒤를 따라 완도행 버스를 타고, 또 내려서도 따라 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구계등이다. 거기서 세상사 통달한 듯한 주인집 사내를 만난다. 여관에는 득음을 위해 묵고 있는 소리꾼들이 있었다. 하루 밤을 지내고 떠나기로 마음 먹은 말 소리꾼 하나가 바다에 몸을 던진다. 여자의 생사가 불안해진 ‘나’에게 여자가 찾아오고 둘은 관계를 가진다. ‘나’는 여자의 사연을 듣게 된다. 이른 아침 여자가 먼저 떠난다.

여자는 죽으러 구계등에 갔다가 ‘나’를 만나고 다시 삶을 찾았다. 자신이 어떤 남자와 헤어지고,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해 죽으러 왔는데, ‘나’를 만나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삶을 찾게 된 것이다.

구계등. 불과 한달 사이에 우연히 구계등을 찾아 묵었고, 또 우연히 구계등을 소설에서 만났다. 새벽에 봤던 그 기묘한 광경이 떠올랐고, 소설에서 말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이해됐다. 그러면서 소설 속 내용이 내 기억 속의 공간을 어떻게 정의내렸고, 재구성했는지도 뒤늦게 알게 됐다. 단지 으스스했고 몽롱했던 그 공간은 그 이해된 경계선으로 고착됐고, 구계등이란 공간은 제주 여행을 가기 전 우연히 들린 장소가 아닌, 인연으로 나에게 다가온 장소가 됐다.

한동안 내 제1의 여행지는 완도 구계등이었다. 보고 먹고 즐길 것은 그다지 없다. 그러나 그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선이 종잇장 하나 수준이라는 당연하지만, 자주 생각하지 않는 깨달음을 준 공간이었다. 지금도 누군가 이러한 고민을 하면 권해준다.

“완도 정도리 구계등을 가봐라. 단 가기 전에 윤대녕의 ‘천지간’을 꼭 읽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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