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런 글을 사람이 썼을까? 이토록 생경한 단어들이 종이 위를 유영하며 조합을 이뤄갈 때, 그래서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시켜나갈 때 작가의 고통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됨직한 글을 선물하는 전경린의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이다.

여자의 인생 그중에서도 스무살에 무한애정을 갖고 있는 작가 전경린은 이 책에서 역시 마른 눈으로 스무살의 수련을 그려나간다. 그토록 비참한 일상, 그러나 그토록 담담하게 살아내고 있는 스무살의 수련은 특별한 아이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 모두의 평범한 스무 살일 뿐이다.

죽어가는 할머니, 고통스러운 엄마, 남 같은 아빠, 철없는 동생들, 그리고 쥐에 의해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신… 방학을 맞은 대학생 수련이 문득 집을 뛰쳐나와 연극 무대를 경험하면서, 또 성인 남자를 알게 되면서 세상에 눈떠가는 행보에는 스무 살의 나도 있고, 내 친구도 있고, 엄마도 있다. 모두가 스무 살이었을 시절, 아무것도 완전하지 않았던 비린내 나던 시절의 찬란하도록 눈부신 고통을 담담하게 그린 책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에는 우리 모두의 스무 살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할지도 모르던 스무 살의 초조함은 서른 살이 돼도 서른다섯 살이 되어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인생은 통째로 초조함의 연속이라는 것인지…

(사진=신리비 기자)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몰랐고, 이 다음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몰랐던 스무 살 여자애였다. 세상은 텅 비어 있었고 무엇을 해도 심심했고 아무것도 긍정할 수 없었다. 다만 아주 막연히 어딘가로 가고 싶었다. 아침이면 늘 같은 자리에서 눈을 떴지만, 모든 방은 섬으로 떠가는 뗏목 같아서, 나는 밤새 물위에서처럼 노를 저었다. 말하자면 나는 아직 알속에서 살고 있는 듯 이 세계에 대해 막연하고 어슴푸레하게, 하나의 추상으로서 둥둥 떠 있었다. 제 속의 노른자를 파먹으며 한 마리 새가 되어가는 흰자위처럼.

정말 연극을 할 거야?”
찻집을 나오자마자 성재가 물었다.
“왜, 뭐가 이상해?”
“네 결정이 너무 즉흥적이어서.”
성재는 마침내 그래도 된다는 듯이 화난 표정을 지었다.
“늘 그런걸. 그런다고 크게 실패할 것도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니?”
“사소하니까. 지금 나의 생이란 어차피 너무 사소한 걸. 이걸 하든, 저걸 하든, 뭔가를 하든, 아무것도 하지 않든 차이가 없어.”
“나중엔 차이가 나지. 지금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이. 아주 나중엔.”
나는 성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걸 지금 알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필연적으로 해야 할 것들을 미리 안다면 이렇게 막막하진 않겠지.”

연경이나 다른 아이들의 생활은 합리적으로 보이고 그녀들이 소유하고 경험하는 사물을 통해 구체화된다. 적어도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그것을 할 수 있는 바닥이 존재하며 안전하게 보호받으면서 계단을 밟듯 차근차근 미래로 나아가는 느낌이다. 소망이라든가, 계획, 그리고 기다림과 실행과 생산적인 결말과 비전들… 그러나 나의 생활은 불합리하게 닫혀있다. 너무 불합리해서 우리 가족은 누구도 누구를 설득하지 못한다. 나에겐 사물도 없고 기다림도 없고 오직 심연 위에 걸쳐진 상상만 존재할 뿐이다. 프랑스 섬들의 악명 높은 감옥처럼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엄마 아버지가 혀를 내밀며, 네게 날개가 있다면 어떻게 해보렴 하는 것 같다. 때로는, 집이 그만큼이나마 평화로운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아이고, 이 늙은 육신, 어서 죽고 싶다. 죽어보고 정말로 귀신이 있으면 다시 안 태어날란다. 꽃으로도 안 태어나고 새로도 안 태어나고 무서운 귀신이 될란다. 귀신이 돼서 아무 데로도 안가고 이 집을 돌면서 내 새끼들 잘 되게 지킬란다.”
할머니가 흡사 죽어서 바다에 묻힌 문무왕처럼 그렇게 말할 때면, 죽는다는 것이 그냥 몸을 바꾸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할머니도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죽음이란 다름아니라, 몸이 썩는 일이라는 것을. 사타구니 사이로 줄줄 피고름을 흘리는 일이라는 것을. 자기 속에서 자기인 것을 모두 잃어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신세한탄조차, 기억과 소원과 사랑조차도.

이해란 무엇일까. 소통이 불가능한 채로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러니 이해한다는 건 곧 억압하는 데 성공한다는 뜻이 아닐까.

나는 그 일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그즈음엔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나중에 알게 될 일투성이. 모든 것은 유보되어 있었다. 삶은 기다림이다. 당장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아직 남겨진 시간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없이 무심한 편이었다. 스무 살이란 아직 시간 이전에 붙박여 있는 나이였다. 손오공이 얼굴만 내놓고 바위벽에 갇혀 있듯이, 삶이란 좀처럼 시작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고, 혹은 무슨 일이든 일어나야 할 것만 같거든…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경험을 했다 해도 마찬가지야. 초조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험을 버리지만 여전히 초조해. 첫 경험 뒤엔 다음 경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 초조함이 언제 끝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