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길] 무의식적으로 써온 ‘악’…언어를 바꿀 때 세상도 바뀐다

이지영 기자 승인 2021.01.06 09:50 의견 0
사진제공=메디치 미디어
(사진=메디치미디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우선순위로 챙기는 존재다. 위험할 때, 이득을 분배할 때, 공과 과를 따질 때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이도 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내가 좋아하는 이에게 해가 되는 상황이라서, 친구와 거주지를 모두 버리고 홀연히 떠난 사람.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은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이 되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외국으로 떠났다. 자신의 존재가 문 대통령에게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렇게 호주에 갔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이 책을 썼다.

故 노무현 대통령 시절 언론비서관 때는 양비로 불렸고,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누군가의 입에 ‘비선실세’로 오르내렸으며,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시절엔 3철 중에 하나로 불렸다.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킹메이커’라는 호칭도 달렸던 이가 양정철 원장이다. 3년 가까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원장으로 돌아왔다.

정치 현안에 밝고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 최측은에서 보좌를 담당했던 그가 오랜 기간 고민하면서 쓴 책이 ‘세상을 바꾸는 언어’다. 다음 행보를 위해 정치적인 서적을 쓸 줄 알았지만, 그의 관심은 언어로 향했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언어 중 누군가를 비하하고 상처 주는 용어의 변화를 원했다. 소통의 수단으로서 우리 언어 안에 담긴 문명성과 양식, 이성의 현주소를 다섯 가지 키워드인 평등, 배려, 공존, 독립, 존중으로 나누어 짚었다

예를 들어 미망인은 미처 죽은 자를 따라 죽지 못한 여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 여성에 대한 무시가 담겨있으므로 바뀌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처녀작’은 남성 중심의 사회를 대변하는 언어이며, ‘종북’ ‘좌빨’과 같은 언어는 색깔의 차이가 아닌 망국으로 가는 언어라고 주장한다. 또는 가볍게 ‘피로 회복’ 대신 ‘기력 회복’이나 ‘체력 회복’을 써야한다는 의견도 담았다. 언어에 대해 깊이 있는 고찰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 책을 통해 전달된다.

그러면서 그가 전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언어의 변화를 통해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인본주의적 사상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첫 걸음이라는 점이다. 가장 눈에 띈 문장이기도 하다.

작은 언어부터 변화해야 궁극적인 큰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게 요지인데, 이 메시지가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나는 과연 모든 이들을 존엄히 여기는가. 나와 다른 사고나 신념은 물론 내가 비호하는 패션이나 부족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살진 않았는가 등등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모든 인간은 존엄한데, 나만의 기준점 가운데서 누군가는 인정하고 또는 무시해가며 살아온 스스로를 반성하게 됐다.

영화 ‘부산행’에서 김의성이 공유와 정유미, 김수안에게 나가라고 날 뛸 수 있었던 건 침묵하는 뒤에 있던 일반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연상호 감독의 말처럼, 악은 어쩌면 우리 주변, 우리의 마음, 또는 일상에 있을 수 있다. 내면 또는 무의식에 잠재하고 있는 악을 처치해 나갈 수 있는 근본적인 신념이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나는 충분히 존중받고 있는가. 혹은 그만큼 다른 이를 존중하고 있는가.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한데 그걸 놓치고 산 건 아닐까. 혹여나 실수를 하더라도 바로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내가 되도록 마음을 닦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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