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늘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체인 듯 제멋대로다. 혹자는 이런 삶 앞에서 좌절하지만 삶에는 자비가 없다. 혹자는 힘껏 맞서 싸우지만 삶은 또 쉽사리 져주지 않는다. 그런 삶을 우리는 끝내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 마음먹고 혼자 살 생각에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던 30대 후반, 나는 회사 일과 별개로 작은 카페를 하나 열었다. 음악이 흐르고 커피가 있고, 사람과 수다가 있는 곳, 그곳은 늘 로망이었다.
“카페 하나 해 볼까?”라는 제안에 가족들은 흔쾌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 카페를 오픈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직장생활을 하던 나를 위해 가족들은 기꺼이 매니저가 되어 나의 첫 사업을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삶은 이 같은 낭만을 질투한다.
손님과 맞서 싸우는 게 일상이었고, 친구들의 아지트가 된 곳이 나의 카페였다. 첫 사업보다 커리어가 더 중요했던 나의 신경은 늘 회사 일에 가 있었고 어느새 카페는 짐이 되어 있었다. 낭만은 모든 손님이 끊기고 난 늦은 밤 문은 닫은 카페에만 있었다. 커피 한잔을 뽑아 놓고 음악을 튼 채 책을 읽는데 나는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장사가 적성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가게를 내놓았지만 쉽사리 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이 떠난 일에는 더욱 소홀할 수밖에 없는 법. 결국 임대료와 인건비로 내 월급을 쏟아 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자 나는 크나큰 수렁에 빠졌다.
그 때 즈음 혼자 살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한다며 작은 집을 한 채 샀다. 물론 큰 금액의 대출이 껴 있는 집이었다. 집 대출금에 카페 운영비를 감당하기에 내 월급은 한 없이 초라했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카페는 주인을 찾아 넘겼지만 내 수중에는 빚만 남은 상태였다.
난생 처음 큰 빚을 남긴 첫 사업, 아니 장사, 아니…나의 호기. 그 대가는 혹독했다, 오랫동안 타고 다니던 차를 팔아 빚을 갚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던 당시의 나는 그래도 꾸역꾸역 위기 속에서 기어 올라와 또 다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책 ‘진이, 지니’를 만나고 나서야 당시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를 막연히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 ‘진이, 지니’는 ‘7년의 밤’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정유정 작품이다. 영장류 연구센터에서 근무하는 진이는 일에 회의감을 느끼고 잠시 여행을 준비한다. 물론 영장류 연구센터는 떠나기로 하고.
그녀의 마지막 근무 날, 그것도 퇴근 직전 시간에 탈출한 보노보 소식을 들은 진이는 마지막 임무를 맡는다. 우여곡절 끝에 보노보를 구출해 연구센터로 향하던 진이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의식을 잃었던 진이가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자못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간 진이의 의식을 가진 채 보노보 지니의 몸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보노보가 된 진이에게 모든 것은 변수이며 역부족이다.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그녀는 어차피 영장류. 사람들의 포획 시도를 끊임없이 헤쳐 나가면서 자신이 왜 지니의 몸속으로 들어가게 됐는지 상기한다.
작가에 따르면 ‘진이, 지니’는 선한 가해자의 트라우마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실제 책 속 진이는 인간에게 납치당한 보노보가 자신에게 보낸 구원 요청의 눈빛을 외면했던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집은 있지만 돌아갈 수 없는 신세의 민주가 등장한다. 보노보 지니를 만난 민주는 그가 인간의 영혼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흡사 인질처럼 지니에게 조종 당한다.
이야기는 마치 판타지 같지만 지극히 현실적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트라우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무기가 되어 인간을 쓰러트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 ‘여기가 나의 한계다’라고 인식하는 마지노선을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책은 바로 이 트라우마를 통해 성장하는 인간을 그린다. 고통 없이 성장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 고통을 통해 나는 오늘 이만큼 성장했을 수 있던 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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