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기억 속 순수했던 어린 시절은 풍요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 어릴 적에는 우리 집이 잘 살았지”라는 회상은 흡사 술자리 안주처럼, 가끔은 무용담처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짐작컨대 그것은 실제라기보다 당시의 감정이었을 테다. 내 아이에게 무엇이어서 아까울 수 있을까. 그것은 2019년의 지금과 1980년도의 그때가 다르지 않을 모성이다. 아낌없이 받은 아이의 기억은 풍요로 채워진다. 바로 이 정서적인 지점에서 “나 어릴 적에는 우리 집이 잘 살았지”라는 일종의 무용담이 나오는 것이다.
필자의 기억 속 어린 시절도 분명 풍족했다. TV라든지, 전화기라든지, 냉장고라든지 하는 생활 필수 가전이 아니라 커다란 전축이라든지 방 한 면을 다 채운 산호 어항 등을 기억해 봤을 때 아빠의 취미는 경제력에 대한 자신감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과신이었을까? 기억도 구체적이지 않을 어느 순간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았던 어린 내 생각에 ‘가난’이라는 단어를 심어준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담임선생님이 본인만 따로 불러서 연필이며, 노트며 학용품을 챙겨주며 안쓰럽게 바라봤던 눈빛이 기억나는 걸로 미루어 보건데 가난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던 것 같다. 무려 아홉 번의 전학 끝에 더 이상 전학을 하지 않아도 된 학년이 5학년 무렵이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건 아홉 번의 전학만큼이나 계속됐던 이사의 풍광이다. 당시 잦은 이사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금성출판사며, 삼성출판사며 하는 곳에서 나온 백과사전, 위인전 등의 책을 엄마는 무척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단칸방 시절의 우리 집 한쪽 벽면은 산호 어항대신 책이 채웠을 정도로 엄마의 책 사랑은 각별했다. 어른이 되고서 돌이켜 보건데 그것은 모성이었다. 가난해 졌다고 해서 모성도 가난해지지는 않았을 터. 엄마는 어린 나와 두 살 터울의 동생에게 책 읽으라는 잔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대신 언제나 눈에 가득 들어올 만큼의 책을 벽면 가득 채워두었다. 잔소리를 하지 않는 대신 그 많은 책들을 전시해 놓음으로써 무언의 의무감을 심어준 것도 같다.
그리고 그때 사진처럼 선명히 새겨질 만큼 많이 본 책이 위인전 ‘을지문덕과 살수대첩’이다. 아마도 금성출판사에서 내놓은 위인전집이었으리라. 당시 나의 이모부는 금성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던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
이 책 ‘살수’가 출간되고 첫 장을 넘길 때까지도 나에게 을지문덕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이미지다. 그렇게 보고 또 봤던 ‘을지문덕과 살수대첩’을 이제 소설 ‘살수’로 다시 마주했다.
■ 세상과 삶의 이치를 통달한 문덕, 그는 고구려에 내려온 신이 아니었을까?
을지문덕은 ‘삼국사기’에서도 김유신에 이어 두 번째로 등장하는 영웅이다. 하지만 출신 가문이나 생년월일조차 표기되지 않았을 만큼 길게 서술되지 않았다. 그만큼 사료가 없는 탓이다.
저자 김진명은 우리의 5000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굴까를 생각하다가 을지문덕을 쓰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다만 남겨져 있는 ‘침착하고 굳센 성격에다 지략이 있고 글 짓는 법까지 알았다’라는 정보를 가지고 1500년 전 문덕을 환생시킨 것이다. 작가는 중국의 역사 왜곡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심정으로 소설 ‘살수’ 1, 2권을 집필했다. 고구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저자는 고독한 영웅 을지문덕과 살수대첩에 얽힌 이야기를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을지문덕이라는 영웅의 재조명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어떤 수장이 필요한지도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음양은 너무나 단단히 물려 있어서, 한 가지를 건드리면 다른 한 가지가 흐트러지는 법이네. 내가 나의 마음만 따르면 하늘의 이치가 모두 흐트러지고 말겠지”
영양왕 시절 뛰어난 지략가이자 난세의 영웅이었던 문덕은 이처럼 이치를 꿰뚫고 있는 인물이었다. 언제나 말이 없지만 늘 파격을 이야기 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은 중원을 통일하고 황위에 오른 수나라 양견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천자임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제례를 준비하던 양견은 요순시대의 순임금이 즉위 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예를 갖추었다는 기록을 발견하고 진노한다. 그는 남아있는 기록들을 불태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구려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한편, 첩자를 통해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알게 된 을지문덕은 영양왕을 찾아가 묘책을 일러준 후 수나라가 보낸 사신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림으로써 군사를 준비 중이던 수나라를 도발하는 계책을 내놓는다. 잇따른 도발로 수나라가 전염병과 기후를 염두에 두지 않은 30만 대군 출정을 하게 한다. 이로써 칼 한번 대보지 않은 승리를 거둬낸다.
양견의 뒤를 이어 수나라 황제 자리에 오른 양광은 을지문덕의 뛰어난 전략을 꿰뚫었다. 과거 한번 마주쳤던 것만으로 범상치 않은 인물됨을 알아본 양광은 116만 대군을 고구려로 보냈다. 오랜 전쟁은 고구려를 패하게 하는 듯 보였으나 이 또한 을지문덕의 지략이었던 터. 신출귀몰한 고구려 군대에 아연실색해 돌아가던 수나라 군사들은 살수에 이르러 몰살에 가까운 수장을 당한다.
살수는 지금 평안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며, 낭림산에서 발원해 서해로 들어간다. 이 강은 구조적으로 거의 직선을 이루고 있는데, 강물로 뛰어드는 군사가 한눈에 보여 아주 쉬운 공격목표가 되었다. 중문과 문술이 끌고 살수를 건너던 군사는 30만 5000명, 그러나 그들이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다만 2700 명뿐이었다.
이처럼 뛰어난 지략으로 불가능 할 것 같았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을지문덕은 책 속에서 살수를 뒤로 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이는 살수대첩 이후 한 번도 사료에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맺어진 결말로 보인다.
613년부터 을지문덕의 이름이 더는 어디서도 나오지 않는다. 특별한 전공이 없어서 굳이 쓸 까닭이 없었던 것인지, 어떤 몹쓸 음모에 말려 쓸쓸히 죽었던 것인지, 안타깝지만 아무리 상상을 동원해도 그 최후를 알 수 없다. 이 전쟁을 고비로 고구려는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영양왕의 시대가 굵직한 전쟁에 휘말려, 비록 을지문덕 같은 영웅의 활약으로 자기의 시대는 보전했으나, 그들에게 입혀진 상처 또한 만만하지 않아 고스란히 그 짐은 후대에 전해졌다. 그렇다면 을지문덕의 전공은 상처뿐인 영광이었을까.
전쟁을 그만두기로 한 3년 뒤, 곧 618년 3월에 나라 안에 정변이 일어 양제는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그것은 수나라의 최후나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이세민의 당나라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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