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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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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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은 단 한마디에 결정되곤 한다. 어린 시절 내 친구는 “넌 정말 미술을 꼭 해야겠다”는 은사의 말에 따라 미술의 길에 들어섰다. 비단 이 친구 뿐일까. “넌 이걸 잘 하는 것 같아”라는 말에 인생이 달라졌고, 방향이 잡혔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명사들을 우리는 수도 없이 봐왔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한 인간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긍정의 말만 뿌려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한마디에 자신의 성격을 규정하고 “난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릴 적 들었던 상처의 한마디가 평생을 뒤따라다니는 트라우마에 벗어나지 못하는 이도 있다. 지난 7월만 해도 학생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넌 쓸모없는 아이야”라는 말과 함께 아이 목덜미와 손목을 잡고 복도부터 계단까지 교사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법원은 피해 아동이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아이가 계단까지 끌려간 행위에 받은 상처도 상당했을 테지만 장난을 쳤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쓸모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 역시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터다.
말 한마디가 그래서 중요하다. 그 말 한마디가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고, 엄청난 인재를 세상에 배출하기도 한다. 출간 직후 12주 동안 아마존을 휩쓴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사일런트 페이션트’ 역시 이같은 말의 중요성을 곱씹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남편을 죽인 후 침묵을 지키는 여자와 그 여자의 입을 열게 하려는 심리 상담가를 통해 인간이 내뱉는 말의 무게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슬럼프에 빠진 화가 앨리샤 베런슨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해보인다. 남편 가브리엘은 그런 아내를 위해 노트를 선물해주는 등 마음을 위로하려 애쓰지만 극도로 불안해보이던 앨리샤는 어느 날 밤, 귀가한 남편의 얼굴에 다섯발의 총을 쏴 살해하고 만다. 남편을 살해한 후 앨리샤 역시 죽으려 했지만 현장에 출동한 의료진에 의해 살아나게 되는데 그는 마치 생명과 목소리를 맞바꾼 양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남편을 살해한 희대의 악녀로 앨리샤가 그린 그림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지만 그가 왜 남편을 살해했는지는 앨리샤의 입이 열리지 않으면서 결국 미궁으로 빠져들고 만다. 모든 심리상담가들마저 지쳤을 때 범죄 심리상담가인 테오 파버는 앨리샤를 치료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원래 있던 직장을 떠나 앨리샤가 수감된 정신질환 범죄자 감호 병원으로 오는데 드디어, 파버의 시도에 앨리샤가 입을 연다. 그러나 앨리샤의 입을 열게 만들겠다는 테오의 결심은 테오마저 끔찍한 방향으로 이끌고 만다.
‘사일런트 페이션트’는 입을 열지 않는 여자의 비밀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독자들의 마음을 이끈다. 출간 한 달 만에 브래드 피트의 A24와 안나푸르나 픽처스 공동 제작으로 영화 판권까지 계약이 체결됐는데 소설은 영화를 염두에 둔 듯 빠르고 극적으로 흘러가며 독자들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작가가 당장 메가폰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으리만큼 작품의 흐름은 영화의 특성과 비슷하게 진행된다. 무엇보다 이 재미난 비밀의 끝을 향해 가는 작가는 그리스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지식과 젊은 시절 정신병원에서 일했던 경험을 적절히 버무려가며 흥미를 더한다. 독자를 대신해 실타래를 풀어가야 하는 남주인공 테오의 직업이 심리 상담가인 만큼 작가는 대표적인 심리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앨리스 밀러와 도널드 위니캇, 그리고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들을 인용해가며 앨리샤의 비밀에 한발씩 접근해나간다.
이렇듯 심리학적으로 접근하기에 소설 전반에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지점들이 여럿 터져 나온다. 방황하던 테오를 바로 잡아준 스승의 말, 앨리샤의 닫혀버린 입을 여는 테오의 말, 앨리샤를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정신과 의사의 말, 정신병원 안 원장부터 간호사까지 그들이 하는 말들 전부에는 인간이 일상에서 내뱉고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들이 어떤 이에게 어떻게 가 닿게 되는지를 느끼도록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작가는 이같은 주요 인물들의 말들을 치밀하게 엮어가며 독자들을 혼란과 탄성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이 덕분에 소설은 점점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독자는 어렴풋이 짐작했던 인물들이 하나둘씩 용의선상에서 비껴가다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건이 발단이 됐다는 점을 깨닫는 순간 스릴러 소설 특유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책 속 인물들의 심리는 이 작품을 더욱 긴장감 넘치게 만드는 요인이 되며, 책 속의 말들이 이 인물들의 심리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이 어지러운 안개 속에 갇힌 듯한 문제를 작가는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힘있고 매력적인 필력으로 무장해 독자들 앞에 쏟아놓는다. 작가가 노린 시간차 공격마저 인상적인 엔딩을 선사한다. 이와 함께 독자는 책을 덮으며 말하게 될 것이다. “역시 말을 조심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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