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의 페미니즘은 점점 온도를 높여가고 있다. 간혹 잘못 가거나, 너무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자칭 페미니스트들을 볼라치면 논쟁을 벌여보고 싶지만 진정으로 남녀의 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은 늘어가고 있다.
이 가운데 한 페미니스트에게서 “당신도 여성이면 일련의 사건 자체만 봐서는 안 된다. 여성과 남성의 권력 차이에서 모든 게 시작됐다는 것부터 인지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남성과 여성, 천지 차이의 권력 속에서 모든 차별이 시작됐고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는 그 안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 말을 들은 후 여성의 과도한 피해의식은 아닐까, 어쩌면 여성은 그 권력 안에서 때로는 남성보다 편하게 살아온 걸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모든 이득과 편의를 대입한다 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남성과 여성은 너무도 ‘차별적으로’ 살아왔다는 것만은 인정해야 했다. 오랜 역사를 지나오며 일상에 너무 깊이 파고 들었기에 그 점을 인지하고 고쳐나가기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그의 말은 오래도록 남았다.
역사도 그랬다. 당장 우리나라만 봐도 적나라하고 적나라하다. 이 가운데 중세 유럽 역사 속에 실존했던 한 지식인 남성의 무모한 도전은 여자가, 지구의 역사 속에서 어떤 존재로 인식돼왔는지를 새삼 또 깨닫게 만든다.
영국 저널리스트 웬디 무어가 쓴 ‘완벽한 아내 만들기’다. 중세 유럽의 역사 속에 실존했던 지식인이자 사상가, 토머스 데이는 인생을 통틀어 이성에게 네 번의 퇴짜를 맞는다. 그는 아버지와 사별한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해 여자를 불신하는 존재였다. 여기에 더해 두 명의 여성이 약혼과정까지 갔다가 결혼을 목전에 두고 자신을 거부하자 여자들이 교육을 잘못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하기에 이른다.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는 생각은 아예 배제한 채다. 그는 아는 것은 많지만, 그래서 동성 친구들에게 인기는 높지만 세간이 말하는 매너는 갖추지 못한 남자다. 교양없어 보이는 몸짓과 지저분한 외견은 여자들이 자신을 기피하도록 만든다. 여기에 더해 토머스 데이는 그 시대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화려한 치장과 사교 관계를 치가 떨리게 싫어하는 남자다.
결국 그는 넘쳐나는 부와 자신에 대한 확신 아래, 완벽한 아내를 ‘만들고자’ 한다. 법률가 친구의 도움을 받고, 이미 가정을 이룬 친구를 공식적 후견인으로 내세운 채 그는 고아원에서 자란 두 명의 소녀를 구두 버클값만 내고 ‘구매’한다. 이후 그는 철저히 자신의 목적을 숨긴 채 두 소녀에 혼신의 교육을 쏟아내고, 이윽고 한 소녀를 택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욕심이 과했던 걸까. 그는 자신이 선택하고 이름까지 준 사브리나에게 혹독한 정신적 육체적 고문을 가하며 자신에게 완벽히 굴복하는 여성이 될 것을 종용한다. 어린 나이에, 자신을 고아원에서 꺼내준 데이에게 헌신하던 사브리나는 데이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결국 내쳐진다. 이후 데이는 여러 여자를 거치며 자신을 사교성 넘치는 남자로 탈바꿈하려는 노력까지 기울인다. 그 사이에서도 사브리나는 몇 번이나 데이의 결혼상대 후보에 오른다. 그러나 결국 데이는 자신이 늘 부르짖던 여성과 전혀 다르게 성장한 여성과 결혼한다.
사실 중세 유럽이라는 시기를 두고 봤을 때 남자들의 권위주의적 행동과 더불어 여성, 그것도 고아인 최하위 계급의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 아주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주목할 점은 토머스 데이의 교양을 좋아하고 인격을 사랑했던 그의 친구들과 지인들 어느 누구 하나 사브리나의 이야기로 그를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하게 생각했고, 심지어 열렬히 동조하고 응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은 토머스 데이는 어떤가.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도 이중적이었고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더욱 더 가식적인 인물이다. 흑인 인권, 동물 보호 등에 눈물을 흘리고 대중에 호소했던 그였지만 같은 인종이자 인간인 사브리나란 여성의 인권이나 인격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역사 속에서 그가 걸었던 길이 그의 이중성을 더욱 소름돋게 할 뿐이다. 무엇보다 이 책 저변에 흐르는 감정이 ‘여성 혐오’라는 점이 보는 이들의 머리털을 쭈뼛 서게 만든다. 남성보다 지적 능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외모를 가꿀 줄만 알지 검소함의 미덕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 토머스 데이가 여성에 대해 가진 확신이었다. 이 때문일까. 소름끼치게도, 데이는 결혼에 성공하고도 아내에 대한 정신적 압박과 구속을 이어간다.
하나 더, 토머스 데이는 자신의 배우자감을 엄격하게 고르고 따졌다. 그러나 자신의 치부나 실수, 단점은 전혀 생각지 않았다. 이러한 모순은 그의 절친인 에지워스를 통해 더욱 더 도드라지게 비교된다. 에지워스와 데이 모두 장자크 루소의 ‘에밀’에 푹 빠졌다. 에지워스는 에밀의 교육방식에 매료돼 큰아들을 시험대에 올리지만 큰 실패를 맛본 후 어느 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녀 교육에 나서는 아버지로 성장한다. 여성과의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기혼의 몸으로 진짜 자신이 원하던 여성을 만난 에지워스는 오히려 아내와 관계를 개선하려 고군분투한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의 실패를 어떻게 수정해가야 하는지를 삶의 지지대로 삼고 끊임없이 노력한 케이스다. 이와 다르게 데이는 늘 상대를 탓하고 상대의 단점만을 찾아 헤매는 삶을 살아간다. 결국 결혼한 뒤에도 자신을 들여다보기보다는 상대를 바꾸는 것으로 결혼생활을 영위하려 했다.
이런 저런 이유를 차치하고라도 사브리나란 여성은 예뻤고, 교양있고(이는 데이 덕이었지만) 사교성 있는 성격을 가지고도서도 데이로 인해 엉망진창인 삶을 살아간다. 비단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로만 볼 일은 아니다.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고착화된 관념이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렇기에 매력없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중세 유럽 50부작 드라마 같은 이 책의 의미는 남다르다.
다만, 지루하다. 앞서 언급했듯 중세 유럽의 매력없는 이들이 등장하고 퇴장했다 다시 등장하기를 반복하는 50부작 드라마를 주구장창 보는 느낌이다. 토머스 데이와 사브리나,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는 논픽션이다. 그렇기에 작가로서 최대한 많은 사실을 넣고 싶었을 거란 점을 감안하고도 그렇다. 토머스 데이의 이중성이나 그 시대 지식인들의 이면까지 드러내기에 필요했을 이야기이긴 하다. 그러나 굳이 자질구레한 인물과 에피소드까지 몽땅 집어넣을 필요는 없었다. 걸러내지 않은, 너무 많은 정보의 나열이 오히려 이 책의 매력을 떨어뜨린다. 그럼에도 전세계적으로 ‘미투’가 난무하는 지금, 페미니즘을 둘러싼 설전이 끊이지 않는 요즘 여자를 존재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은 한 남자의 삶은 되짚어볼 가치가 있다. 3세기를 지나왔음에도 딱히 달라진 바 없는 성(性) 권력, 그 씁쓸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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