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악인들은 결코 자신의 민낯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세상 순하게 보였다는 희대의 살인마, 어려운 불우이웃의 탈을 쓰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강력범, 젠틀한 얼굴 속에 숨은 성폭력범, 번드르한 말로 자신을 포장하며 사람들의 등골을 빼먹는 사기꾼들…악인의 실체가 드러날 때마다 대중은 내면과 외견이 너무도 달랐던 이들의 실상에 충격받고 허탈해한다. 지난해 딸의 친구를 살해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영학이 단적인 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난치병을 호소하며 동정을 구했고 그렇게 얻은 돈으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살았다. 이영학 사건이 터진 후 대중이 가장 허탈해한 부분은 인간적 도리를 저버린 그에게 수년 간 온정의 손길을 쏟았다는 데에 있다. 세상은 그를 아픈 몸으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불쌍한 가장으로 여겼지만 그의 실체는 추악함 그 자체였다.
그와 꼭 닮은 인물이 올해 유명 작가의 소설에 등장한다. ‘해리’의 이해리다. 어떻게 저렇게 살아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SNS를 통해 세상에 자신의 기구한 사연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모금에 열을 올리는 인물이다. 봉침으로 권력자부터 동네 아저씨까지 모두 휘어잡고 온갖 패악을 부리지만 세상에는 다시 없을 성녀로 여겨진다. 자궁을 드러냈다고 대대적으로 알려놓고 다시 아이를 낳아도 사람들은 거짓 위에 더해진 거짓에만 열광한다. 당연하게 밝혀졌어야 할 일이, 누구나 조금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었던 거짓말이 오랜 시간 감춰질 수 있는 건 당장 보이는 것에만 반응하는 대중의 속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점을 공지영 작가는 경계하라 말한다. ‘해리’의 이야기는 악에 쉽게 잠식될 수 있는 여론과 세상을 향한 경고다.
봉침을 놓으며 사람들을 제 입맛에 따라 요리하고 휘두르고 추락시키는 이해리, 그리고 카톨릭 신부복 안에 욕망과 악을 깊숙이 감춘 타락의 결정체 백진우 신부를 내세워 세상에 만연한 악을 집약시킨다. 온갖 거짓말로 자신을 둘둘 둘러매고 동정을 구하는 이해리는 화려한 외모로 사람들의 눈을 가린다. 그런 그를 애정인 동시에 도구로 사용하는 백진우 신부는 청렴과 결백의 상징인 신부복, 끝없는 고해성사로 세상을 속인다. 백진우 신부에게 고교 시절 성추행을 당하고 그의 어두운 면을 꿰뚫어 보게 된 기자, 한이나는 운명처럼 이들의 뒤를 캐게 되지만 진실은 알려질 듯하면서도 거대한 세력의 품 안에서 좀처럼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공지영 작가는 이 작품이 5년 동안 취재하고 수집한 실화들을 하나로 짜깁기한 것이라 설명한다. 그의 말처럼 이해리와 백진우란 두 사람이 자행하는 온갖 악들은 지극히 허술하지만, 피해자도 넘쳐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는다. 소설은 바로 이런 모순으로 독자를 홀린다. 당장 밝혀져야 맞을 일들이 자꾸만 가려지고 축소되고 은폐되는 모습은 대중 앞에 좀처럼 속살을 훤히 드러내지 못하는 큰 사건들과 오버랩된다. 이 사건은 그 사건과, 저 사건은 그 때 그 사건과 교묘하게 겹치며 도리어 독자로 하여금 이 이야기들이 정말 있는 이야기는 아닐까 의심케 만든다. 공지영 작가가 영리한 이야기꾼이라는 점이 여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다만 ‘도가니’의 자기복제란 점이 아쉽다. 작가의 철저한 계산 속에 소설의 배경이 된 무진이란 도시나 겹쳐지는 등장인물은 차치하고라도 각자의 이유로 생의 벼랑 끝에 선 주인공들, 악의 축보다 결코 악랄함이 덜하다 부를 수 없는 애인들, 종교를 악용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도가니’의 뼈대 위에 다른 사건들을 덧입힌 인상을 준다.
그렇기에 ‘도가니’를 읽은 독자라면 더욱 몰입도가 높아지는 동시에 반대로 지루해진다. 사건을 감추고 은폐하려는 수많은 방해꾼들, 풍경부터 인물의 면면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시감, 주요인물들의 입을 빌려 세상을 향해 고하는 공지영 작가 특유의 일갈까지도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이 때문에 이야기를 긴박하고 힘있게 끌어가는 작가의 실력에 몰입하면서도 뻔한 스토리를 마주하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이에 더해 그가 말한 악에 대한 작가로서의 감지를 오롯이 체감하기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너무 강하게 드러낸 공지영으로서의 목소리, 그리고 벌려놓은 채 끝나버린 이야기다. 이 소설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는 공지영 작가의 욕심이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익숙한, 세상을 향한 일침들이 이 소설에 유독 즐비하다. 박근혜 정부 탄핵 시국을 지나오며 그가 느낀 점들, 미투를 바라보며 여성이자 사회의 지성인으로 꼭 하고 싶었던 말들, 그가 가까이 하고 또 멀리했을 다양한 언론인들의 모습에 대한 소회가 빼곡히 책 속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이는 소설의 풍미를 더하기보다 오히려 사족(蛇足)이 된 모양새다. 공지영 작가의 꾸준한, 때론 너무 강하다 싶은 이 목소리들이 과하다. 등장인물들이 자연스럽게 하는 이야기로 녹여내려 했지만 실패다. 사실상 공지영 작가의 목소리라는 것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점이 책을 읽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기보다 되레 피로한 지점으로 다가온다.
모두를 만족하는 책을 쓸 수는 없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악에 대해서까지 ‘공지영이라서’라는 색깔론을 뒤집어씌우는 부작용을 야기한 셈이다. 물론 이는 공지영 작가가 평소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드러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책을 보다가 “책장을 덮었다”거나 “성향”을 말하는 일부 독자들의 목소리가 있다는 점이 더욱 아쉽다. 적어도 소설에서만이라도 자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목소리를 조금 더 낮췄다면 ‘해리’에 대한 평가나 판매고는 현재보다 훨씬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때론 과감하게 덜어내야 더 큰 울림을 전할 수 있는 법이다.
100m 질주를 하다 제 풀에 꺾인 듯한 스토리의 짜임새도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해리’는 두 권의 분량을 통해 확장만 거듭한다. 이 이야기가 찝찝한 뒷맛을 남기는 것은 현실을 보다 적나라하게 직시하게 만들거나 ‘사유’할 여운을 남기기보다는 벌려놓고 해결하지 못한 기분이 들게 한다. 등장인물의 뜬금없는 로맨스도 사회폭로 다큐멘터리를 보다 로맨스 장면이 삽입된 양 따로 노는 이야기로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이런 지점들로 인해 끝에서 다시 한 번 다뤄지는 카톨릭 신부들에 대한 이야기 역시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로 강렬한 한방을 전한다기보단 뻔한 B급 영화 결말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해리’를 내놓은 공지영 작가에 물음표는 더욱 많아진다. 가장 큰 물음은 이 책을 쓴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스스로 밝힌 대로 더 많은 이들이 현실의 추악함을 일면이나마 들여다보길 바라서라기엔 편향된 생각과 논리들이 과하다. 촘촘한 얼개로 짜이며 독자의 긴장감을 고조시키지만 손을 놔버리는 데서 오는 허탈감으로 설득력마저 잃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집약한 자기만족이라 치부하기엔 들인 공이 아깝다. ‘도가니’ 2탄이라지만 아우는 형을 넘어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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