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를 읽다] 홍콩 시위가 소환한 덩샤오핑의 지도력

이지영 기자 승인 2021.07.14 10:10 의견 0
사진=민음사
사진=민음사

홍콩 시위가 끝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상황은 격화되고 있으며 홍콩 시민 4분의 1이 참여했다는 시위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이를 두고 중국 작가 옌롄커는 지난달 내한해 정치적 발언을 최대한 자제하면서도 “인류의 자유와 존엄을 향한 모든 노력은 소중하다”고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의 마음만큼은 외면하지 않는 소신적 발언을 했다.

홍콩시위로 인해 중국과 홍콩, 그리고 국내에서조차 20여년 전 사망한 덩샤오핑(등소평)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덩샤오핑은 홍콩 반환 당시 영국 수상과 지난한 협상을 통해 ‘일국양제’ 즉 1국가 2체제라는 깃발을 홍콩에 세웠다.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이 자연스럽게 중국인과 같은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란 조처다. 물론 여기에는 덩샤오핑의 정치적 업적에 대한 포부도 있었을 것이다. 영국이 계약 대상인 신계지역만 반환하겠다고 했을 때 덩샤오핑은 신계의 반환만으로는 청나라 당시의 부끄러운 과거를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버티기에 돌입했다. 그리고 결국 그의 머리에서는 중국 내 홍콩특별행정구라는 ‘1국가 2체제’를 50년간 유지한다는 합의가 도출됐다. 그는 홍콩 반환을 지켜보지 못한 채 1997년 2월 사망했지만 그의 뜻은 여전히 남아있다.

현재 홍콩시위의 주요 논쟁 중 하나인 송환법 파동은 바로 이런 덩샤오핑의 생각 및 정책과 정반대 방향에 서 있다. 때문에 시진핑은 홍콩 시민들의 마음을 잡는 대신 법과 권력으로 억압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덩샤오핑의 가치가 다시 떠올랐다. 그런가 하면 중국 내에서는 덩샤오핑의 발언을 활용해 홍콩 무력 개입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지난 8월 중국관영언론인 신화통신은 덩샤오핑이 생전 “홍콩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중앙정부가 개입해야 한다”고 한 말을 인용해 중국 무력 개입을 시사한 바다. 이렇듯 홍콩과 중국, 그리고 해외에서까지 덩샤오핑을 홍콩 시위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 죽은지 20년이 넘은 덩샤오핑을 부상시킨 홍콩의 상황. 덩샤오핑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사진=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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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어떻게 현대 중국사회가 손꼽는 지도자가 됐는가

덩샤오핑은 중국이 세계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개혁과 개방을 이끈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덩샤오핑 이전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국가를 추구했다. 그러나 강경 노선은 중국인 4000만명이 기아로 사망하는 참담한 현실로 이어지고 만다. 결국 문화혁명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목숨을 잃을 뻔했던 2인자 덩샤오핑은 가까스로 복권해 이후 개방정책을 이끌어나간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아들조차 홍위병 학우들에게 고문을 당하다 창문서 뛰어내리는 바람에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음에도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을 두고 “사람들의 사고를 촉진하고 우리들의 단점을 인식하게 해줬다”는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이후 그는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시장경제를 도입한다. 1978년 미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대외적으로 서방과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했다. 실용주의를 내세우며 과감한 개혁 조치가 줄을 이었다. 그가 발표한 ‘4대 근대화’는 농업의 근대화, 공업의 근대화, 과학 기술의 근대화, 국방의 근대화로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을 보장하고 지방분권적 경제 운영과 엘리트를 양성해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에 더해 외국인 투자 허용 등 개방적 정책으로 중국 경제를 크게 성장시키기에 이른다. ‘조용히 힘을 기르되, 해야 할 일은 한다’는 의미로 한 ‘도광양회 유소작위(韜光養晦 有所作爲)’라는 말을 실천해나간 셈이다.

이같은 근대화 정책은 통제와 획일화에 찌들대로 찌들어있던 중국사회가 개방개혁을 통해 체제의 변화를 일으키도록 했다. 그가 내세웠던 논리가 바로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다. 쥐를 잘 잡을 수만 있다면 검은 고양이든, 흰고양이든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굶주리는 중국인들을 배불리는 데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그 어떤 것에 얽매이지 않고 정책을 펼쳐나간 덩샤오핑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배고픈 백성에게 이념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덕이기도 하다. 결국 그는 중국인을 배고픔에서 해방시켜주고, 미국에 이어 세계 G2로서 국력 발전을 이루도록 한 초석을 마련해준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덩샤오핑이 현대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추앙되는 이유다.

다만 그에게도 뼈아픈 오점이 있다.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다. 천안문 민주화운동은 학생운동으로 시작됐다가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유혈 진압을 단행하며 지도자로서의 명성에 치명상을 입는다. 이전까지 그는 중국을 공산주의 폐쇄된 경제 체제에서 개방된 자본주의 경제로 바꾸며 새로운 성장으로 이끌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기점으로 덩샤오핑이 중국사회의 불평등과 사회적 모순 개혁을 요구하는 이들을 짓밟았다는 비판이 공존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변화와 혁신을 이뤘다는 점에서 덩샤오핑은 여전히 중국 인민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사진=민음사, 일마
사진=민음사, 일마

■ 덩샤오핑 평전&설계자 덩샤오핑

‘덩샤오핑 평전’(민음사)은 미국인이 평가한 덩샤오핑의 생애라는 점에서 보다 객관적이라 할 수 있겠다. 동아시아 전문가 에즈라 보걸 하버드대학교 명예교수는 덩샤오핑 정부 인사, 당 역사 연구자, 가족, 주변 인물 등과의 인터뷰, 그에 대해 발굴된 자료들을 통해 덩샤오핑의 삶을 조명한다. 이 책을 통해 21세기 중국의 시대를 바꾼 걸출한 인물, 덩샤오핑의 전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그 시대 중국을 이끌었던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함께 담기며 중국 현대사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설계자 덩샤오핑’(일마) 역시 시장경제체제와 공산당 일당지배 체제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켜 중국을 지금의 위상에 이르게 만든 그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무비판적이고 지나치게 긍정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은 이전까지의 덩샤오핑 평전과 다르게 충실한 공산주의자였던 면모, 마오쩌둥의 대리자였던 시절 등까지 모두 조명하며 가장 공정한 ‘덩샤오핑’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 역사학자들이 덩샤오핑의 생애를 면밀히 살피고 연구한 끝에 저술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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