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길] 우리의 인생 쉼표에 여행이 필요한 이유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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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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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오로지 홀로 있을 때 읽는 것이 가장 좋다는 생각을 한다. 가장 집중도가 높고, 온전히 책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클럽 소속이 아니라면 책장을 덮은 이후의 사색 역시 홀로일 때 더욱 행복하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자못 즐기기까지 한다.
얼마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가족이 입원한 병실에서였다. 하필 들고 있던 책이 스타작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였다. 환자의 상태가 안정되고 숨소리가 쾌유를 향해 가던 어느 밤, 모두가 잠든 비좁고 고요한 병실 한켠에서 스타작가의 인생 여행담과 여행 철학을 활자로 함께 했다.
오히려 비좁은 곳,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병실에서 이 책을 읽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가 자유로이 움직이는 상황에서, 이국적 풍경들을 눈에 담아내기 바쁜 때였더라면 ‘여행의 이유’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의 의미는 온전히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오도 가도 못하는 회색 병실을 지키며 오직 환자의 쾌유만을 빌어야 하는 상황, 몇 날 며칠을 한 풍경만 바라보는 그 시간들이 작가가 떠난 여행의 의미와 삶의 연결고리, 그 안에서 한 인간이 좌절하고 성장하는 과정들을 오롯이 느낄 수 있게 했다. 김영하의 이십대, 치기어린 여행부터 완숙한 한 인간으로 떠난 여행까지, 나는 온전히 그를 따라가며 사유하고 논쟁하고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여행의 참맛과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 일상인이자 이방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의미들을 생각할 수 있었다. 오히려 여행지에서보다 더 깊고 풍부한 감각들이 함께 한 진귀한 경험이 됐다.
감히 나의 경험을 토대로 ‘여행의 이유’는 비단 여행을 자주 떠나는 이들보다는 쉽게 일상 밖 길 위에 나서지 못하는 이들에게 더 의미 있는 책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물론이고, 그 일상을 지켰기에 비로소 여행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된다. 스타 작가이자 여느 예능인 못지않은 유머 감각을 지닌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를 통해 자신의 첫 여행부터 생의 곳곳에 펼쳐진 기회와 우연, 선물 같았던 경험들에 대해 말한다.
김영하는 문학적으로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라는 존재가 인식되지 않는 여행지에서의 이방인은 그림자가 없는 문학 속 주인공과 비견된다. 그런가 하면 머무는 곳에서 생겨났던 국적, 성별, 피부색에 따른 차별들이 여행자가 될 때 개별성을 잃고 ‘노바디’,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과정을 풀어내며 공감을 이끌어낸다. 아폴로 8호로 찍은 최초의 지구 사진을 두고 ‘인간은 지구의 승객’이라 표현한 한 시인의 말은 김영하를 거쳐 인간관계의 묘미로 거듭난다. 그는 이 말을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대가없는 호의를 베풀고 되갚게 되는 ‘환대의 순환’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p.148)”
이렇듯 이 책은 여행의 이유, 여행의 형태, 여행의 매력, 여행자에 대한 시선 등에 대해 자유롭게 써내려간 글이다. 다만 이를 여행지에서 겪은 경험을 풀어낸 여행담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그는 여행을 중심으로 인간의 삶에 대해 논하고 자신의 업인 글쓰기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사유의 결과를 전한다. 여행이란 키워드는 이 주제들의 교집합이자 연결고리에 가깝다. 그는 허심탄회하게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들에 대해 고백하면서 삶에 널려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끄집어낸다.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학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책이 재밌는 이유는 그의 박학다식과 특유의 위트적 화법이 만난 덕이다. 더욱이 감각적 소설을 쓰는 소설가의 세상에 대한 해석과 관점은 읽는 이로선 즐겁고 말랑말랑하게 다가온다.
김영하라는 작가가 어떤 글을 어떤 과정을 통해 쓰게 됐는지는 물론이고 자신이 작가가 된 이유까지 여행과 삶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과정 또한 김영하 팬들에게 재미가 된다. 소설과 여행의 공통점으로 책을 끝맺는 방식 역시 지극히 소설가다운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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